지금 사는 곳에서 국경 하나를 넘으면 생각보다 금세 프라하에 닿는다. 카프카의 도시. 아름답다고 소문난 그곳을 언젠가는 방문해 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유가 생길 만하면 다른 일정이 들어찼다.
그러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소식을 들었다. 아날로그 IMAX 70mm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상영관이 프라하에 있었다. 드디어 떠날 때가 왔다는 신호였다. 영화의 인기가 상당해서 상영 한 달 전이었는데도 좋은 좌석은 거의 없었다. 날짜를 넘겨보다 일요일 낮 시간에 중앙 좌측 두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예매했다. 그렇다면 전날 미리 도착해 짧게나마 프라하 도심을 구경하면 좋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 여행 자체가 취소될까봐 숙소 예약은 출발 일주일 전까지 미뤘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국경을 넘는, 우리만의 작은 오디세이를 펼치기로 했다.
7월의 토요일 아침, 우리는 프라하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2층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으니 커다란 배를 타고 프라하라는 섬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구글 지도를 켜 숙소와 기차역, 몇몇 카페와 서점, 미술관, 박물관을 저장했다. 1박 2일 동안 이 장소를 모두 다 둘러볼 욕심은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나는 것보다는 한 번쯤 지도를 훑어본 뒤, 기회와 우연이 닿는 쪽으로 흘러가 보는 편을 좋아한다.
세 시간 반가량 아스팔트 바다를 항해한 끝에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했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배낭은 제법 무거웠지만 겨우 이틀 머물다 떠날 도시라고 생각하니 한 걸음이라도 더 걷고 싶었다.
이번에는 카메라도 제대로 챙겨왔다. 최근에는 컴팩트 카메라만 들고 다녔는데, 이번에는 마르코 삼촌이 주신 28-135mm 캐논 렌즈를 처음으로 후지필름 카메라에 달았다. 낯선 도시의 한 순간을 바짝 당겨 뷰파인더 안에서 들여다보는 일. 한동안 잊고 있던 즐거움이었다. 예전에는 단렌즈 3개를 주렁주렁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짧았다. 렌즈를 바꾸는 시간도, 사진 한 장을 위해 혼자 멈춰 서 있는 시간도 줄여야 했다. 누군가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내가 멈추면 상대방의 시간도 같이 멈춘다. 이번에는 가능한 한 함께 걷고, 함께 보면서 사진도 담아내고 싶었다.
프라하의 첫 맛
맥주로 유명한 나라에 살면서도 우리는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독일에는 무알코올 맥주도 제법 맛있는 것이 많다. 이런 생활은 오히려 술을 마셔야 할 날에 빛을 발한다. 마셔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물쇠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체코는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흐름에 따라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독일 친구가 추천해 준 정육점 겸 식당 나세마소(Naśe maso).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들러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미 유명한 곳인지 키오스크 앞에는 관광객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내 자리를 잡고 수제 버거와 탭에서 갓 따른 맥주를 앞에 두었다. 고기도 우리에게는 술과 비슷하다. 평소에는 가능한 한 적게 먹지만, 미식이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가끔 규칙을 느슨하게 한다. 텅 빈 위장으로 육즙 가득한 버거를 베어 물고 고소한 풍미의 맥주를 들이켰다. 고기와 맥주가 뱃속에서 열정적인 폴카를 추기 시작했다.
고열량의 에너지를 충전한 우리는 구시가지의 중세 골목을 지나 카를교를 건넜다. 체크인 시간인 오후 세 시에 맞춰 숙소에 도착했다. 거리 쪽으로 난 창문이 있는 아늑한 방이었다. 배낭만 내려놓고 곧장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걷다 보니 거리 곳곳에서 굴뚝 모양의 빵, 트르델니크를 팔고 있었다. 크루아상 정도의 크기를 예상했는데 아이스크림까지 얹혀 나온 것은 작은 횃불만 했다. 하나만 사서 나눠 먹었어도 충분했을 텐데, 우리는 중세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걷듯 거대한 트르델니크를 들고 계속 걸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다 먹지는 못했다. 단맛에 달려드는 벌들에게 나머지를 내어주었다. 자칫하면 첫 끼와 첫 디저트가 그날의 마지막 음식이 될 뻔했다. 소화시키려면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우연히 닿은 두 권의 책
인파를 빠져나와 비교적 한적한 말라스트라나 골목을 걷는데, 눈앞에 근사한 책방이 나타났다. 지도에 저장해 두었던 셰익스피어 앤 손즈(Shakespeare and Sons)였다. 애써 찾지 않았는데 가장 기대했던 장소가 먼저 나를 찾아온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래된 집의 거실과 주방을 모조리 책장으로 바꾸어놓은 듯한 공간이 펼쳐졌다. 나는 카페든 서점이든 박물관이든 말끔하고 세련된 곳보다 누군가 오래 살다 간 집처럼 느껴지는 공간에 더 쉽게 마음을 내준다.
지하로 내려가자 예술, 사진, 건축, 만화 등 더 많은 카테고리의 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인용 소파에 앉아 책 속에 잠긴 이들을 램프 불빛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은 소파, 책이 폭발하듯 쌓여있는 책상. 이곳에서만 반나절을 보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수많은 책 사이에서 존 버거의 <The Moment of Cubism>(Verso, 2026)과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Ways of Curating>(Penguin Books, 2015)을 발견했다. 프라하의 큐비즘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고, 보는 법과 고르는 법에 관한 책이라면 지금의 작업에도 무언가를 남겨줄 것 같았다.
898코루나, 약 37유로. 두 사람이 배부른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도 공부하고 싶은 텍스트이기도 했고, 이런 서점이 계속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보태었다. 함께 받은 노란색 책갈피까지 마음에 들었다. 단 하루뿐인 프라하. 책방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접고, 흰 표지의 두 책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지나고 보니 무리해서 책을 구매했던 게 참 잘한 선택이었다.
사계절이 지나간 저녁
열의에 찬 걸음이 저녁까지 이어지자 어디든 앉아 쉬고 싶어졌다. 거대한 트르델니크 덕분인지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적당하게 맥주나 한 잔 마시기로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우 메드비드쿠 브루어리(Pivovar U Medvídků)였다. ‘1466’이라는 숫자의 무게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양조장에서 맥주홀로, 카바레로, 사회주의 시기에 잠시 국가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원래 주인을 되찾으며 시대의 변화를 통과한 건물이었다. 한동안 끊겼던 양조의 전통도 2004년경에 소규모 양조장이 다시 들어서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한 종류만 고르기는 아쉬워 테이스팅 세트를 주문했다. 잠시 후 네 잔의 작은 맥주가 나란히 테이블 위에 놓였다. 첫 두 잔은 청량하고 활기찼다. 뒤의 두 잔은 갈수록 맛은 짙고 묵직해졌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과 겨울로 건너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그 계절과 관계된 단어를 동시에 외치기는 게임을 하기로 했다. 함께 보낸 시간에서 나온 말도 있었고, 그 계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엉뚱한 인상도 서슴없이 뱉었다. 겨울맛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앞두고 외친 나의 마지막 문장은 “Der Arbeit ist Schnee!(일이 눈처럼 쌓여있다!)”였다. 네 개의 계절이 짧은 시간 안에 한꺼번에 지나가자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벽화
어둠이 내린 프라하는 낮과 다른 도시가 되었다. 프라하에서 맞는 첫 밤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밤이었다. 남은 힘을 끌어모아 더 탐험해 보기로 했다. 프라하의 맥주 맛에 조금씩 매료되고 있던 우리는 우연히 사람들이 붐비는 바를 발견했다. Bar IV. Budvar 33 맥주를 주문하자 낮고 배가 볼록한 반 리터짜리 맥주잔 풀리트르에 담겨 나왔다. 밝은 라거였지만 쌉싸름한 맛이 선명했다. 방 한쪽에는 열대 식물이 가득한 벽화가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그 그림을 바라보다가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가 생각났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에서 망가져가는 몸으로 완성한 마지막 벽화. 물론 내가 보고 있는 그림과 소설 속 그림은 많이 다르겠지만, 오랜만에 알코올 기운이 스며든 머릿속에서 문학적인 상상을 발휘하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린 카프카가 사진관에서 촬영했다던 야자잎이 무성한 배경도 이와 비슷했을까. 우리는 벽화를 마주한 채 맥주를 마시며 겨울에 떠날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계획과 아이디어를 떠올리기에 그보다 더 적절한 공간은 없었을 것 같다.
오래된 서재와 마지막 맥주
마지막 산책길, 맞은 편 건물에 오래된 책들이 잔뜩 꽂힌 서재가 보였다. 작은 도서관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는데 매력적인 바였다. 카페 클럽 미센스카(Café Club Míšeňská). 책과 함께하는 바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영업 종료까지 삼십 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마지막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출구 가까운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빈티지 가구와 식물, 책들이 뒤섞여 있었다. 오래된 타자기 곁에 맥주잔을 내려놓고 체코어 고서를 하나씩 꺼내 보았다. 한 문장도 읽을 수 없었지만 오래된 종이를 만지고 활자와 장정의 구성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여행이 끝난 뒤 이 건물의 과거를 찾아보았다. 한때 양봉장이 있었고, 오랜 세월 한 가문의 소유 아래 비누와 향수를 만들던 곳이었다. 지금은 2016년부터 카페로 운영을 시작해 지하실은 여러 공연이 열리는 작은 클럽으로 쓰이며 지역 문화와 사람들을 엮는 살롱이 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프라하에서는 카프카를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프란츠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대신 문학적인 기운을 도시 곳곳에서 긁어모으고 있었으니까. 다음에 프라하에 온다면 미센스카에는 낮에 다시 와보고 싶다. 그때는 맥주 대신 커피를 주문해 봐야겠다.
고요한 아침
다행히 숙취는 없었다. 포근하고 조용한 방에서 눈을 떴다.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조심스레 빠져나와 물을 한 모금을 마셨다. 전날 산 두 권의 책과 일기장을 챙겨 창가에 앉았다. 거리는 아직 조용했고, 이따금씩 자동차가 한 대씩 지나갔다. 누군가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혼자 읽고 쓰는 시간을 얻는 일은 귀하다. 독서와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혼자가 되어야 의미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삼십 분, 길어야 한 시간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몇 장을 더 읽다가 문득 쓰고 싶은 말이 생각이 나 일기장을 펼쳤다. 전날의 여정을 복기하는 간단한 기록이었다. 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가장 길게 쓴 건 카메라로 제대로 사진을 찍은 기쁨과 우연히 발견한 서점에서 두 권의 책을 사게 된 이야기였다. 어쩔 수 없이 사진과 텍스트는 나의 오래된 원천인 모양이다. 일기장을 덮고, 책을 다시 배낭에 넣었다.
호텔 체크아웃. 다시 무거운 가방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카를교를 건너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중정이 나타났다. 수백 년 전에는 몰타 기사단 수도회 건물 일부였던 공간에 지금은 L4 Cafe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방을 건물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머리 위로는 하늘이 열려 있었다. 바깥이면서 안쪽이고, 도시의 소음은 한 겹 얇아져 있었다. 카푸치노와 케이크로 프라하의 아침을 열었다.
필름 위의 오디세이
영화가 상영될 시네마 시티 플로라(Cinema City Flora, Palac Flora)는 도심 동쪽에 있다. 트램을 타고 삼십 분 남짓 이동했다. 창문이라는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서 프라하의 건물과 사람과 가로수가 끊임없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쇼핑센터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마침내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붉은 좌석들의 물결을 지나 처음 보는 IMAX 70mm 스크린 앞에 앉았다. 카메라의 뷰파인더에서, 일기장 페이지로, 중정의 건물 사이로 보이는 네모난 하늘에서 이제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던 거대한 스크린으로 시선을 두었다. 빛이 거대한 필름을 한 겹씩 통과해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인 스크린에 경이로운 장면들을 풀어냈다. 그동안 봐왔던 스크린이 실눈을 뜨고 있었다면, 70mm 스크린에서는 눈을 활짝 뜨고 숨겨진 장면 모두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칼립소가 있는 오기기아 섬에서 조금씩 기억을 떠올리는 오디세우스를 따라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함께했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서 상징적인 목소리가 된 제임스 블레이크의 노래에는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영화가 끝나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 마르코가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우리는 영화의 엔딩곡이었던 “When I’m Home”을 반복해서 들으며 소감을 나누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시간까지 4시간 정도가 남았다. 블타바강변에 있는 댄싱 하우스 쪽으로 가서 프라하 중앙역으로 마지막 산책을 즐겼다.
레겐스부르크로 돌아가는 저녁 버스 안에서 새로 산 책을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단 하룻밤의 프라하. 구글 지도에 저장해 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는 가지도 못했는데, 우연히 마주한 짧은 순간에도 예술적인 시간을 누릴 수 있어 놀라웠다. 책방 지하의 보물들, 사계절을 지나던 네 잔의 맥주, 그리고 책들이 가득한 바, 호텔 창가에서 펼친 일기장, 황홀했던 70mm 속 풍경들. 우리는 다행히 오디세우스보다 훨씬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충동에 사로잡힌 나는 그날 새벽 2시까지 이것저것 공부를 요란하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책과 예술로 뒤덮인 삶을 꿈꾸는 나에게, 프라하에서 본 장면들이 자꾸만 속삭였다. 그 꿈은 실제로 존재해. 그러니 어서 다시 한번 더 이곳으로 와서 마음껏 꿈에 사로잡혀 있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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