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 당나귀. 가방이 하도 무거워서 하나씩 붙기 시작한 별명이다. 들고 다니는 화장품은 없지만 일기장과 필기도구, 카메라, 책은 필수로 챙긴다. 렌즈까지 여러 개 넣다 보면 숄더백으로는 감당하기가 조금 버거울 정도로 무거워진다. 가방에 망치 넣어둔 거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만도. 그런 세월이 15년 정도 쌓이다 보니 어깨와 척추도 그 무게를 닮아 갔다.
나도 이렇게 무거운 가방이 달갑지 않다.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나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무더운 날에는 이 가방이 스스로 짊어지는 십자가가 된다. 그러나 15년을 겪으면서 알게 된 건, 필요한 순간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속이 상할 정도로 아쉬운 물건이라는 것. ‘언제 어떤 순간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게 내 삶을 훑는 거대한 진리가 되었다.
물론 모든 기록 도구를 완벽하게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 대신 종목은 줄일 수 없어도 각 종목별 무게는 줄여 보고자 노력했다. 그날의 목적에 따라 내용물의 조합도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요한 작업을 할 때는 후지필름 X-Pro2와 렌즈들을, 일상 생활 중에는 캐논 V1을, 스포츠에 집중하는 날에는 작고 가벼운 무적의 디지털카메라 올림푸스 TG-830을 챙기는 식이다.
토요일 오전. 6월 내내 타지 못했던 자전거를 오랜만에 타고 나가서 강에서 수영을 하고 오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점점 무거워지는 가방이 문제였다. 마르코는 나와는 정반대로 간단히, 가볍게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뭘 빼놓고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처음 한국에서 마르코를 만났을 때 그의 자전거 옆에 주렁주렁 걸려 있던 가방들이 생각났다. 한국과 일본을 누볐던 가방이 옷장 속에서 가만히 놀고만 있었다.
챙기던 짐을 통째로 자전거 가방에 넣고 차고로 내려갔다. 자전거 가방을 달기 위해 뒷바퀴 위에 랙을 설치했다. 가방은 꽤 묵직했는데 시범 운행을 했을 때 운전에 불편함은 없었다. 오랜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옛날 사람들이 처음 낙타를 길들여 짐을 등에 올렸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필요한 물품을 거의 다 챙겼는데도 어깨와 등은 시원한 바람으로 가득하다. 운전석에 앉았을 때 조수석에 가방을 던져 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동이다.
도나우강에 도착해 자전거 가방에서 야외용 매트와 일기장, 필기도구, 책을 꺼냈다. 심지어 마르코가 읽을 책까지 다 넣고 이제 어디든 움직일 수 있다. 수영을 한 후 매트에 누워 도란도란 독서 시간을 가지다가 일어나 앉아 일기를 마저 썼다. 기록하는 삶을 축소하지 않고 온전히 누릴 방안이 마련되어 무척 행복하다. 자전거 가방 하나가 꽤 많은 것을 가볍게 만들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기록을 포기하기보다 기록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든 만들어 가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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