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를 조립할 때면 첫번째 나사를 일부러 느슨하게 조여둘 때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단단히 조여버리면 다음 나사가 들어갈 자리가 맞지 않아 애써 조인 나사를 다시 풀어야 하는 일이 생기거든요. 모든 조립면을 알맞게 맞춘 뒤 나사를 하나씩 마저 조이면 훨씬 깔끔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저에게 여행은 이 가구 조립과 비슷합니다. 실제 삶에는 가구를 조립할 때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존재하지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치밀하고 빈틈없이 계획하려 들면, 정작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대처할 여유가 사라집니다. 평소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애써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니 여행에서만큼은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조급 헐겁게 남겨두는 편이 좋습니다.
사실 이번 자전거 여행도 그렇게 느슨한 계획이 아니었다면 시작부터 꽤 골치 아픈 여정이 되었을 것 겁니다. 목요일 밤에 짐을 모두 챙겨두고 금요일 출발을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마르코와 저의 일이 자꾸 늦어졌거든요. 결국 출발을 하루 미루기로 했습니다.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해하기보다는 하루 더 여유를 갖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토요일 아침, 냉장고에 남아 있던 식재료를 탈탈 털어 김치볶음밥을 만들었습니다. 재료를 처리하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가장 만만한 메뉴이지요. 마지막으로 음식물 쓰레기까지 모두 비우고 집을 나섰습니다.
시각은 정오 무렵. 예상보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첫날 이동할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페달을 밟기로 했습니다. 마르코의 GPS 기기에는 바커스도로프(Wackersdorf) 근처 무어너 호수 캠핑파크(Campingpark Murnersee)가 목적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날씨도 화창했어요.

제가 살고 있는 레겐스부르크는 독일 바이에른주 동부의 오버팔츠(Oberpfalz)에 속합니다. 도나우강 유역의 평야에서 시작해 나프강(Naab) 계곡을 지나면 체코 국경을 따라 이어지는 오버팔츠 숲의 산지가 나타나는 지역이지요. 유럽의 여러 나라와 도시를 잇는 도나우강에는 수많은 지류가 흘러듭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중 하나인 나프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갈 계획입니다. 이후 더 작은 지류인 발트나프강(Waldnaab)을 따라 체코 국경 근처의 발원지에 도달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목표일 뿐입니다. 처음 떠나는 자전거 장거리 여행이니 언젠가는 체력의 한계를 마주하게 될 테고, 그 순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꽤 현실적인 문제일 테니까요. 그동안 장거리 자전거 주행을 연습하면서 넘어지거나 다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먼 거리를 달리는 이번 여정에서 사고가 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겠지요. 운과 체력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보자, 그 정도의 마음으로 첫 페달을 밟았습니다.
두 강이 만나는 그림 같은 중세 마을
레겐스부르크에서 북쪽으로 약 30km를 달리면 독특한 풍경을 가진 마을이 나타납니다. 석회암 절벽과 그 위에 자리한 중세 성터, 그리고 절벽 아래에서 만나는 나프강과 필스강(Vils). 칼뮌츠(Kallmünz)는 마치 그림 속에서 꺼내놓은 듯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칼뮌츠는 20세기 초부터 예술가들이 여름 동안 머물며 작업하는 예술가 마을(Künstlerkolonie)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추상회화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도 1903년 여름 이곳에 머물며 함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칼뮌츠는 제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자전거 장거리 주행 연습을 할 때 처음으로 목적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 4월 처음 방문했을 때는 마을 전체에서 어린이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교통이 통제되는 바람에 다리 근처 벤치에 앉아 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지요. 토끼 같은 아이들이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 그래도 그림 같던 마을이 더욱 동화 속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리 건너편 카페에서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 한 잔을 즐긴 뒤 다시 레겐스부르크로 돌아간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을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거리가 꽤 남아 있어 일단 조금 더 달려보기로 했습니다.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이 작고 예쁜 마을을 저는 자꾸 지나치기만 하네요. 다음에 올 때는 절벽 위의 성에도 올라보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보고 싶습니다.
칼뮌츠를 빠져 나가는 길에는 넓은 강변 녹지 공간인 암 슈미트뵈어(Am Schmidwöhr)가 있습니다. 나프강과 필스강이 합류하는 지점이지요. 그곳에 다다르자 경쾌한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피자 굽는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음악은 피자 트럭 맞은 편에 세워진 빈티지 커피 픽업트럭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재빨리 눈빛을 교환한 뒤 자전거를 세웠습니다. 오늘 점심은 바로 여기라는 계시라도 내려온 듯, 마침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지는 벤치 하나가 비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열심히 달려온 우리에게는 땀에 젖은 몸을 말리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였지요.
독일어에 이탈리아어 특유의 억양이 맛깔나게 섞인 아저씨의 피자 트럭, 라 베라 피자바겐(La Vera Pizzawagen)에서 버섯이 가득한 푸나히 피자(Pizza Funahi)와 아티초크, 올리브가 올라간 카프리초사 피자(Pizza Capricciosa)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받고 보니 피자 도우도 두툼하고 양도 상당했습니다. 하나만 주문해 나눠 먹어도 충분했을 것 같았어요.
뜨거운 햇살에 젖은 옷이 거의 다 마르고, 시원한 탄산음료와 함께 갓 구운 구수한 피자를 먹고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습니다. 결국 제 버섯 피자는 절반이나 남아버렸습니다. 포장 종이 상자를 야무지게 접어 넣고 남은 건 나중에 긴급 식량으로 먹기로 했습니다.

자, 식사를 마쳤으니 피자를 먹는 동안 여러 번 눈이 마주쳤던 커피 아저씨네에서도 에스프레소를 한 잔쯤 마셔줘야 공평하겠지요.
박물관에서 그대로 몰고 나온 듯한 자동차는 1930년대에 생산된 푸조 201 T 카미오네트를 전기차로 개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201 T 상용차 계열은 모두 1676대만 생산되었다고 해요. 이 이동식 카페의 주인인 쿠르트 로젠마이어 씨는 날씨가 좋은 금요일과 주말, 공휴일이면 이곳 암 슈미트뵈어 주차장에서 커피 가게를 엽니다. 때로는 다른 행사장으로 출장을 나가기도 하고요.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신기한 마음에 자동차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쿠르트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아보라며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셨습니다. 저는 이 강렬한 파란색이 마음에 끌려 아저씨에게 왜 하필 이 색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내 눈동자를 보세요, 파랗잖아요. 하하! 제가 파란색을 좋아한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티셔츠도 파란색으로 입고 왔네요.”
알고 보니 푸조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훨씬 전부터 커피 그라인더를 만들던 회사라고 합니다. 전기로 달리는 새 심장을 얻은 푸조 카미오네트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커피향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며,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제 다시 출발할 시간이지요.
무어너 호수로 가는 길
나프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러 작은 마을을 지나 슈반도르프(Schwandorf)까지 달렸습니다. 도중에 마트에 들려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음식을 샀습니다. 냉장 보관이 필요 없는 식재료를 중심으로 골랐지요. 아, 그리고 지역 맥주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자전거로 지나온 부르글렝엔펠트(Burglengenfeld)와 나베크(Naabeck)의 이름이 라벨에 적힌 맥주를 한 병씩 골랐습니다. 두 맥주 모두 슈반도르프의 나베크 성 양조장에서 생산한 것으로, 이곳의 양조 역사는 16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네요. 나프강을 따라 지나온 마을의 이름을 맥주병에서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문제는 자전거 가방이 이미 터지기 직전이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나머지 식재료들은 미리 챙겨온 에코백에 넣어 마르코가 어깨에 둘러메기로 했습니다. 비상용 에코백은 언제나 제 몫을 해내네요.

슈반도르프를 지나 크론슈테텐(Kronstetten) 북쪽에서 숲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자갈이 섞인 비포장도로가 나무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졌습니다. 이 일대는 샤를로텐호퍼 연못 지대(Charlottenhofer Weihergebiet)의 남쪽에 해당합니다. 오버팔츠에서는 중세부터 물고기를 기르기 위해 연못을 조성해 왔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주변에 풍부한 생태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이제는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지요. 한참 숲길을 달리다가 아름다운 연못이 나타나는 바람에 자전거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면 위에 담긴 구름과 푸르게 퍼진 초록 물결, 그리고 그 위를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었거든요. 잠시 목을 축이며 풍경을 바라보다 다시 페달을 밟았습니다. 평화로운 5분간의 휴식이었어요.
무어너 호수 캠핑파크
오후 6시 15분, 드디어 캠핑장에 도착했습니다. 귀여운 강아지가 리셉션 앞에서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2026년 9월 기준 캠핑 요금은 텐트 한 동에 5유로, 성인 한 사람당 13유로로 둘이서 총 31유로를 지불했습니다.
캠핑장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캠퍼밴과 카라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마다 작은 집 한 채와 마당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 캠핑장 가장 안쪽에 자리한 텐트 구역으로 향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자전거를 세우고, 우리는 곧바로 맥주부터 꺼내서 한 모금 진하게 마셨습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함께 나베커 슈페치알 맥주의 진한 풍미가 폭죽처럼 터졌습니다. 우리의 작은 축배였지요.
텐트를 설치한 뒤에는 샤워장으로 향했습니다. 화장실과 샤워실 모두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어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머리를 말리며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맥주병을 손에 들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캠핑장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습니다.

무어너 호수와 브뤼켈 호수(Brückelsee) 사이에 자리한 이 캠핑장은 과거 갈탄을 채굴하던 지역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채굴이 종료된 이후 땅을 복원하고 물을 채우면서 지금과 같은 호수 지대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아까는 오랜 양어업의 흔적이 남아 있던 숲속의 연못을 지났고, 이곳에서는 산업 활동이 끝난 자리에 생겨난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바꾸어 놓아도 자연은 더 긴 인내심으로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네요.
걷다 보니 어디선가 떠들썩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무라노 비치클럽에서 파티가 한창이었어요. 입장료는 10유로였지만, 우리는 근처 데크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조금 더 평화로운 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호수는 건너편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넓어 마치 바다처럼 느껴졌어요. 발밑에서 찰랑이는 물결 소리를 들으며 데크에 벌렁 누웠습니다.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별들은 하나둘 선명해졌어요.
그러다 문득 별안간 행복한 기분이 온몸에 번졌습니다. 자동차 엔진이나 다른 외부 힘이 아니라, 온전히 제 두 다리의 힘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커다란 성취감을 줄 줄은 몰랐습니다. 내일은 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달리게 됩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순수한 기대감이 밀려왔습니다.
오후 8시가 조금 넘어 캠핑장 안의 씨사이드 레스토랑 비어가르텐(Seaside Restaurant / Biergarten)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집을 떠날 때부터 식사 중 한 끼는 꼭 슈니첼을 먹어야겠다며 노래를 불렀거든요. 마르코는 베이컨 치즈버거를, 저는 버섯 크림소스와 감자 뢰슈티를 곁들인 바이들러 슈니첼을 주문했습니다. 마침 탑로더Toploader의 <댄싱 인 더 문라이트Dancing in the Moonlight>까지 흘러나왔어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저녁 식사였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캠핑장을 걸어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전자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강을 거슬러 이곳 무어너 호수까지 오는 동안, 강물은 부지런히 우리가 출발한 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을 겁니다. 내일은 과연 어떤 길을 달리게 될까요? 모든 여정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즐겁습니다. 여행 첫날부터 나사를 단단히 조여둘 필요는 없으니까요.